JeeMin Kim Solo Exhibition
«Prototype Temple : We Shall Rest»
프로토타입 템플: 우린 쉬게 될 거예요
25. 10. 2025 - 22. 11. 2025
세운홀
“ 마음에 드는 노 ( 櫓 ) 를 찾으라 , 우리 함께 항해를 하자 ……. ”
지난 < 프로토타입 템플 : 6 피트 아래 _계곡 >(2022) 에서 우리는 , 병들었던 자들의 무덤을 방문했고 ,
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항해를 시작하는 꿈을 꾸었다 . 회화에서 흰 색의 노를 찾아 노를 저었다 .
장난스럽게 놀래키는 소리 , 그들의 좋았던 때 에서 들려오는 리라의 에코를 들었다 .
휘발된 사람들 , 병든 사람들 , 그들의 행복한 시간 , 그리고 , 그들의 영광됨 .
항해를 시작했던 우리는 어느 새 한 섬에 도착하였다 .
나는 강렬한 쉼에 대한 갈망으로 이번 전시를 계획했었다 . 사랑하는 모두와 함께 완전한 안식을 찾기 위해서였다 .
하지만 전시가 그 형태를 갖춰 갈 수록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는 과연 쉴 수 있는가 ? 벌써 ?
결국 우리는 섬 ( 전시 ) 를 한 바퀴 돌아 나가며 , 나가는 문에 다다라서야 전시의 제목을 보게 된다 .
“ 우린 쉬게 될 거예요” 1)
당신이 도착한 이곳은 섬이다. 작가에 의해 섬으로 정의 된 이 공간은 일종의 무대, 시나리오 진행 지대이되 서사의 강제력은 아주 희미하게, 작가가 제시한 몇 가지 단서들로서, 낮게 깔린 물안개처럼 섬 주변을 맴돌 뿐이다.
당신이 바라보는 것들, 추상적 상징들과 풍경, 건축적 오브제와 움직임, 들려오는 소리 – 그 모든 것이 일체를 이루며 섬을 구성한다. 이는 일종의 유적을 재현한 디오라마일 수도, 혹은 어느 시간선에선가 소환 된 실재일 수도, 또 혹은 실재의 환영, 그림자일 수도 있다. 당신은 무대의 배우 일 수도, 유적의 탐사자일 수도, 혹은 유령의 관찰자, 또는 관찰되고 포착된 무언가의 관객 일 수도 있다. 수 없이 겹쳐 진 가능성의 층위들은 브레히트적 서사극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 사이를 오가며 마법사의 꿈2)을 구성한다.
‘섬’은 통상적으로 바다로 완전히 둘러싸인 땅, 육지로 이어져 있지 않아 물리적 접근에 한계를 가진 지형을 일컫는다. 신화에서 역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섬은 미지의 낙원, 잊혀진 보물 창고,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3), 그러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땅4), 도달했다면 벗어나야만 하는 공간5) - 고립과 완결의 이중적 표상으로 묘사 되어왔다. 그 속에서 틸식민주의의 논의는 섬을 ‘발견’된 존재가 아닌 식민-지정학, 제국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개념으로서 주목한다. 섬은 ‘나’의 대지와 ‘다른’ 것으로, ‘대륙’의 존재들로부터 타자화되며, 섬에서의 온전한 삶은 늘 ‘땅’의 삶과 구분지어지고, 개척과 점령, 정당한 착취의 대상으로 격하된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아저씨」는 ‘개념적 섬’을 배경으로 삼는다.a 「바냐아저씨」가 상연되는 무대는, 누군가는 쉽게 드나들고 스쳐 지나갈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삶 그 자체인 공간. 평생을 벗어날 수 없는 삶이 매인 땅으로서 섬이다. 이번 전시의 부제는 이 「바냐아저씨」의 마지막 구절에서 기원한다.
“ 지금 우리의 불행을 감동과 미소로 돌아보면서 우린 쉬게 될 거에요 . 전 믿어요 , 뜨겁고 열렬하게 믿어요… 우린 쉬게 될 거에요 !”
We shall rejoice and look back upon our grief here. A tender smile -- and -- we shall rest. I have faith, Uncle, fervent, passionate faith. We shall rest. 6)
읽는 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방면으로 해석되는 이 구절은b 희곡임으로 인해 무대 위에서 연출과 연기자에 따라 수없이, 수많은 갈래로 구현 되고, 또 다시 읽혀져 왔다.
작가는 청소년기 서구 문화권으로 이주했고 자연스럽게 그 안에 동화되어 문화를 향유 했다. 문화권 일반의 당사자들에 비해서도 더 깊이 녹아들어 근세 이전의 신화, 신화 시대의 흔적들이 누적된 근대의 문학, 음악, 나아가 동시대의 것까지 폭 넓게 자신의 양분으로 삼으며 성장기를 거친다. 박물관 속 유물, 폐허의 유적은 다정했고 성가의 목소리, 관현악의 울림, 앞선 지성인들의 통찰은 작가적 성육을 구성하는 정수가 되었다.
그러나 지나간 시대에 대한 향수, 자신의 것이었던 적이 없는 것들에 대한 노스탈지아는 숙명과 같이 작가를 19세기 고고학과 현대 고고학의 간극 - 발견이라는 미명하에 과거의 실재를 의지와 목적에 따라 재조립했던 식민주의와의 조우로 이끌었다.c 서구 근대문화의 요체로서 식민주의가 작동한 방식은 마치 금을 제련하는 과정과 같았다 - 제국이 취한 가치 있는 것 외의 것은 가려지고 배제되며 없는 것으로 여긴다 - 그러나 제련의 과정이 그러하듯 ‘불순물’은 매질 속에 녹아들고 공기 중으로 기화할지언정 사라지지 아니한다. 작가는 자신이 자양분으로 삼은 애상에 대한 탐구의 길 위에서 발견한 괴리의 감각을 외면하지 아니하였고, 결국 그것을 단서 삼아 시대가 감춘 ‘불순물’을 건져 올리고 만 것이다.
불순물과 빛나는(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는) 것의 공존은 정제된 결과물이 빛날수록 불안정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공존을 받아들이며 얻게 되는 미지의 가능성, 중첩이 자아내는 모호함 그 자체를 작가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증명으로 인정하고 나아가 자신의 작업의 근간으로 삼는다. 그 과정의 일부로 이번 작업에서 작가는 섬이 지닌 이중적 메시지 위에 자신만의 섬을 세우고, 그 위에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피어나는 자신의 의지를 부제로 새겨넣었다.
과거의 전쟁과 제국주의적 침탈은 국가의 이름에 따라 승자와 패자, 가해자와 피해자로 구분 지어 지고 - 실제 그 가해와 피해의 양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음에도 - 역사라는 허울 아래 동시대와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는 전 지구를 지배하는 식인자본주의d의 흐름이 만들어낸 눈속임일 뿐, 그 이면에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피 흐르는 상처가 생생한 고통으로 자리한다. 인신매매를 비롯한 식민 착취e, 정의되지 못한 대량학살, 일상의 풍경이 된 분쟁들. -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의 공인이 있어야만 피해이고 죽음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유전자 조작 기술, 점점 더 도달 시점을 당겨오는 초인공지능 역전시대, 이미 도래한 기후 디스토피아 - 이로 인한 죽음을 타살이 아니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인류가 인간 - 그러나 스스로라고 칭하기엔 부조리한 – 이 만들어낸 착취적 진보의 세계관(흔히 발전, 더 나아지는 것이라고 오해 되는)에 갖혀 무너져내리고 있음은 꽤나 자명한 현실이다.
작가는 알고 있다. 제국주의에서 출발한 문화적 성취들을 양분으로 자라나 여전히 식민주의의 구도가 지배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자신이 ‘안전’하고 ‘완벽’한 답에 이를 수 없음을. 그러나, 그럼에도 작가는 여정을 멈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섬에 발을 내디딘다. 혹자가 삶에 결국 휴식이란 불가능할지라 이야기하더라도 섬 아닌 섬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되돌아보며, 삶을 살아가고자 나아간다. 누군가는 쏘냐의 의지를 비관할지라도 그 외침 안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믿고 그것이 존재함을 되새긴다. 지금 쉴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 여정이 또 다른 섬을 만들어내는 과정일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곳이 러닝 룸f이 되길 소구하며, 조금의 틈, 휴식을 향해.
완성될 수 없는 개념적 건축, 상연되지 않는 무대, 본문을 읽을 수 없는 소설, 마치 보르헤스의 오솔길과 같은 이 공간 – 섬은 결국 그 무엇도 아님으로서 미술적 실천이 되며 답을 얻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으며 나가는 발걸음이다.
2 0 2 5 年 1 0 月
문혜주 g
1) Prototype Temple : We Shall Rest 작가노트, 2025, 김지민.
2)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 민음사.
3) 유토피아 혹은 아틀란티스
4) 유배지로서의 섬
5) 대표적으로 오디세우스의 수많은 여정은 섬에 발을 디디고 그곳을 떠나는 과정으로 구성 된다.
6) 「바냐아저씨」 안톤 체호프, 소냐의 마지막 독백
a 바냐는 도시에서 생활하는 자신의 매형을 위해 죽은 누이의 영지를 평생에 걸쳐 가꾼다. 누이의 딸 소냐와 함께 밤낮없이 노동하며 소냐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매형인 예술대 ‘교수’가 위대한 성취를 이룰 것이고 그것이 자신의 가치와 같이 여기며 살아간다. 바냐의 어머니에게 교수는 세상 누구보다 위대한 예술가이다. 그러나 은퇴 후 영지로 돌아온 교수를 보며 바냐는 그가 그렇게 대단한 예술가도 무엇도 아닌 것을, 그저 괴팍하고 이기적인, 평범한 노인임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 교수는 영지를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너무나도 쉽게 팔아넘기고자 한다. 바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영지, 그리고 그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고 괴로워하며 처절하게 무너진다. 일련의 사건 후 결국 교수는 다시 영지를 떠나고 영지에 남겨져 바냐에게 소냐는 위 인용의 말을 건낸다.
b 이를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완벽한 쉼, 이상향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앎에도 나아가는 인간의 의지와 삶에 대한 애착으로 보는 해석과 달리 인간의 삶에 진정한 휴식은 없다는 비관, 우울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매함에 대한 메타포로 읽어내는 이들도 있으며 혹자는 그 양가적 가능성 자체가 체호프의 미학이며 체호프가 의도한 바로서 의미를 지닌다 보기도 한다.
c 인류의 골동취미는 문명의 기원과도 맥을 같이한다 일컬어질 정도로 유구한 취미지만 학문으로서 새로이 구성 된 19세기의 고고학은 당시 제국주의 발흥의 맥락을 따라, 착취와 약탈, 맥락적 이탈의 수단이자 기수였다. 서구 열강들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며 그 지역의 보물과 역사를 빼앗아 자국의 박물관(내지 집안 한 구석)에 가져다 놓았고, 약탈한 문화재의 수를 자신들의 제국적 능력을 보여주는 척도로 삼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4대문명론’ 역시 이러한 배경으로 태동한 것으로, 공통적으로 서양의 침략이 가장 일찍 시작된 곳에서 4대 문명이 비롯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맥락을 찾아내고 과거의 흔적을 되짚는 것이현대고고학은 19세기 초기 고고학과 대별 된다. 「테라 인코그니타」, 강인욱, 창비, 2021. 참조
d cannibal capitalism. 낸시 프레이저가 제시한 개념이다. 냉전시기 국가들은 대립의 과정에서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표면적으로나마 갈등과 대립의 정당성 확보를 시도했다. 그러나 현재 국제 정세에선 스스로의 행태를 정의로 포장하려는 시도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아주 얄팍한 파시즘적 선전을 걷어내고 나면 그 이면의 모든 과정은 타자를 착취하고 식민화하여 자본으로 환원하는 과정일 따름이다. 학살 현장은 무기 선전의 장이 되며 국가는 더 이상 공동체를 보호하지 못하고 거대 자본에 의해 잠식된 채 국민 생명조차 숫자로 집어삼키는 자본의 추동을 따를 뿐이다.
e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이루어진 범죄로 인해 인신매매라는 단어가 언론 위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이지만, 실질 대한민국은 현대적 의미의 인신매매 - 자발적 선택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기망적 노동 착취와 비자 사기 등 - 가해국으로 오랜 시간 지목되어 왔다. 그럼에도 이에 대한 대책은 여전히 미비한 실정이다.
f 렘 콜하스가 정의한 정크 스페이스의 범람에 맞서 할 포스터가 제시하는 개념으로 비평 종말, 사이비 역사의 시대에 자율성과 역사 감각을 회복시키기 위한 공간적 실천을 지칭한다.
g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전문 석사과정 중에 있다. 2023년 ARCO 우수전시지원사업 《비핵화선언》 등 상업화랑을 기반으로 기획 및 집필 활동하고 있다.
*전시 구조물은 폐스티로폴이 재활용 되었습니다. 전시 종료 후 마감재를 벗겨낸 후 다시 재활용을 위해 공장에 보내집니다.
*전시에 사용된 12그루의 나무는 전시 종료 후 고양시 덕양구에 심어질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