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어: 노스탤지어 알레고리 인용 아이 아
양효실(미학,비평가)
상업화랑(용산)에서 열린 김지민 작가의 2023년 개인전 《프로토타입 템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는 “프로토타입 템플”이란 제목 아래 열린 세 번째 전시로 이번에는 설치 작업인 “움직이는 샹들리에”와 회화 연작인 “침묵의 선”으로 구성되었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메인 전시장인 템플의 ‘직전(直前)’으로써, 가파른 절벽이나 좁은 산길을 재연한 가벽이 나타나고, 어두운 통로를 침침한 눈으로 지나야 무대-장소인 템플 에 있을 수 있다. 템플이 일상적 기능을 담당했던 시·공간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대도시에서 불쑥 만나는 템플은 동시대적 현재와의 불연속성이나 어긋남, 그 시대착오성 덕분에 (포스트)근대적 건물로 변한다. 템플은 근대 문명의 타자로서 근대 안에서 근대 너머를 표상한다. 그러므로 건물의 위용이나 부식 정도로 물리적 시간성을 체현한 템플의 (반)역사성은 포스트모던한 우울이나 냉소와 인접한다. 시간(변화)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그곳에 모이고, 종말론적 우울과 함께 근대를 살아내는 이들에게 그곳은 신도 부재하는 일종의 폐허로 읽힐 것이다. 템플은 들어가서 앉고 숭배하려는 반역사적인 믿음의 인간들에게는 성소일 것이고, 알레고리적 읽기의 대상으로 근대를 해독하는 이들-예술가들에게는 역시 근대적 잔해일 것이다. 자신의 맥락을 모두 상실하고 고립된 채 불현 듯 시야에 들어오는 템플은 발터 벤야민이 “알레고리적 전형”과 동일시했던 폐허의 이미지 같다. 오웬스는 「알레고리적 충동」에서 “과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확신과 그 과거를 현재를 위해 되살리려는 욕구, 이들은 알레고리의 가장 근본적인 충동들이다”고 적는다.[i] 김지민 작가의 템플은 부실하고 보잘 것 없다. 작가의 템플의 ‘성물’은 골동품상에서 구입한 듯한 샹들리에, 동양화인 척하면서 벽에 주르륵 걸려 있는 회화들이다. ‘움직이는’ 샹들리에, 템플의 샹들리에에 대한 위반/전복인 샹들리에의 상하왕복운동은 다른 켠에 비치된 도르래에 의해 조작되고, 기름칠이 덜 된 금속-연골의 뻐걱거림은 철에 죽음을 기입했고, ‘검은’ 연못에 살짝 ‘발’을 적시고 다시 올라가는 샹들리에는 기이한 채로 움직이는 ‘사물’로 현시된다. 그리고 템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대체한 듯 한 무채색 회화, 육체성-살의 상실로서의 모래라는 효과를 위해 바닥에 깔린 소금과 같은 요소들도 역시 기호학적-현대적 환유로 읽힌다. 신이 부재하는, 몇 개의 알레고리적-기호적 요소들-파편들로 전치된 이 무대를 구성한 것은 이제 막 서른이 된 젊은 (여성)작가이다.
더욱이 작가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은 글, 전시 정보를 놓고 보면 ‘프로토타입 템플’의 구성은 상당히 많은 작가들, 파스칼 키냐르를 제외한다면 이제는 죽은 자들인 작가, 화가, 철학자, 종교적 인간의 텍스트들에 기반한 것이다. 샹들리에는 직접적으로는 보들레르의 문장을 인용한 것이라고 작가는 써두었다.[ii] 제대로 볼 턱이 없는 시인-알레고리주의자 보들레르에게 샹들리에는 템플 혹은 극장의 주역이다. 무수한 인간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을 목격한 샹들리에, 삶과 죽음의 반복이란 유한성을 ‘위’에서 응시하는 사물-기호이다. 작가는 그런 샹들리에를 위에서 아래로 끌어내리고, 삐걱거리는 관절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에 유한성/육체성을 입힌다. 그러므로 원전 보들레르에서 조금 혹은 많이 이탈한다. 그리고 “침묵의 회화” 연작은 우선 추상표현주의 화가 헬렌 프랑켄탈러가 1950년대에 창안한 “적시고 물들이기(soak stain) 기법, 즉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옅고 가늘게 물감을 발라 수채화처럼 번지고 스며드는 효과를 성취하는 기법을 차용해서 최근 작가가 푹 빠져 있는 “동양적인 것”을 시각화한 작업들이다. 헬렌의 회화는 유화와 수채화 사이에서 움직이고 김지민의 회화는 먹의 번짐과 농담에 기반한 동양화와 캔버스의 유화 사이에서 움직인다. 제목의 일부분인 “침묵”은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의 환유적 인용이고, 여기에 중국어에서는 침묵의 묵(黙)과 먹물의 먹(墨)이 같은 성조라는 점과 “침묵은 금”이라는 전승되어온 경구가 섞여있다. 그래서 작가의 “침묵의 회화” 연작은 모두 침묵과 등치인 금색 선이 그어져 있고, 먹물로 그려졌고, 말할 수 있는 것(회화로서의 색)이 거의 제거된 무채색이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작가의 회화와 설치는 여기저기서 갖고 온 것들을 조각조각 기운 것이다. 김지민은 “저자, 저자의 인격, 역사, 취향, 열정”이 더 이상 예술의 “기원”일 수 없는, 이른바 “저자의 죽음 이후”의 새로운 예술은 그러므로 “문화의 수천의 화덕에서 나온, 인용들로 짜인 직물”이라고 선포한 바르트의 시각예술 쪽의 후예 같다. 바르트는 “자신의 텍스와 동시에 태어나며 글쓰기에 앞서거나 글쓰기를 초과하는 존재는 어떤 식으로도 갖지 않는 그는, 자신의 책의 술어일 뿐 주체는 전혀 아니다”고 말하는 데,[iii] 김지민의 인용, 잇기, 외관상으로는 전혀 콜라주가 아닌 콜라주는 문학의 장을 예시로 든 바르트의 포스트모던한 주장을 시각예술에서 구현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10살에 부모의 결정(월권)으로 유학을 가고, 격리된 기숙사에서 홀로(닥치는 대로, 계보없이) 고전-경전을 읽고, 바깥의 무시무시한 변화와 역사성의 개입에서 자유로운 채 수용성(receptivity) 자체인 자신의 몸에 육체성으로 각인시킨 이 “제3세계”에서 온 여자 아이의 알레고리적 시선, 텍스트-짜기가 가능했다고 나는 읽는다. 동시대적 문화 환경 안에서 친구들과 모국어로 ‘성장’하는 대신에 작가는 유물들, 죽은 자들의 글자들, 그들의 파토스와 고백들, 성찰들 사이에서 그것들을 갖고 직물을 짜는 기호학자 혹은 바르트가 말하는 필사자(scriptor)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아이, 자기 이야기(내면)를 표현한다든지 이 세계에 대해 재현한다든지 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가-저자의 상투형을 배우지 않은 아이가 쓴 짧은 단편/픽션에 등장하는 아이에게서 나는 작가를 본다. 군인과 사제, 아이가 등장인물인[iv] 이 이야기는 갑자기 끝나고, 사건들은 이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한 겨울 출타 후 수도원으로 돌아오던 늙은 수도승이 눈밭에 버려진 아이(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를 안고 들어온다. 아이는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욕망이-없다고 간주된 노승과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 속 깊은 곳” 혹은 “마지막 정거장에서 내려서도 산 속을 한 참을 걸어 올라야” 있는 곳에 격리된 채 산다. 아이가 흥얼거리는 노래는 성가(聖歌)이고, 아이는 사회적 정체성에 필수적인 타자-거울이 노인뿐인 이 격리된 시·공간에서 무지하고 무구하다. 아이는 고전을 읽고 고전을 배우고 작곡도 한다. 아이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파란색 꽃”을 꺾었고, 생명을 죽인 아이를 향해 노인이 화를 낸다. 파스칼 키냐르에게서 갖고 온 “꺽여진 꽃”이라는 알레고리적 이미지(작가의 템플은 곧 꺽여진 꽃이다. 근대에 템플이 모순이라면 “꺽여진 꽃”도 모순이다)는 “일종의 극심한 개화. 불시에 덮쳐 경탄을 일으키는 감동. 심장을 관통하는 그 무엇”이라는 키냐르의 설명을 통해 이해되어야 하는 ‘사건’이고 그렇기에 ‘소유욕’으로 (잘못)읽은 수도승의 (관습적/개념적)읽기를 이미 한참 전에 지나쳤다. 수도승은 그런 읽기, 그런 미적 숭고를 정녕 이해하지 못한다. “삶과 동시에 죽음을, 고통과 동시에 희열을 초래하는” 어떤 불가능한 사태-비극에 대한 아이-예술가의 매혹이 아이를 노인에게서 떼놓는다. 그리고 화려한 복장을 한 채 피를 흘리는 군인이 도움을 요청하며 신성한 공간에 침입한다. 노승은 아이와 군인의 만남을 두려워한다. 목발을 짚고 절룩거리는(겉은 남성이지만 이미 거세된?)군인의 눈에 아이는 “이성과 체면을 마주한 적이 없는, 껍데기 없는 벗은 살덩어리”, “연한 핏덩이”, “천박한 동물”로 읽힌다(이런 문장은 김지민의 ‘자기’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바깥-전쟁에 대해 들려주며 아이의 곁을 차지한(노인에게서 아이를 떼어놓은) 군인이 어느 날 아이의 뺨을 후려친다. 아이는 피를 흘린다(아이가 꽃을 꺾었고 이제 군인이 아이를 꺾는다). 아이는 이 이유 없는 폭력을 노승에게 숨긴다. 군인은 아이에게 이름을 준다. 노승은 아이에게 이름을 주지 않았지만, 군인은 아이에게 이름을 줌으로써 사회/상징계로의 진입을 유도한다. 아이가 얻은 이름 “아”는 알파벳의 첫문자 A, 아이 아(兒), 나 아(我), 그리고 탄식의 아(ah!)를 동시에 함축한다. 이 중 어느 것이 아이의 ‘정체성’으로 굳게 될 것인지는 아이가 들어갈 사회가 결정할 것이다. 군인은 노인을 죽이고 왔던 곳으로 절룩거리며 돌아간다. 아이도 “불바다”, “전쟁터”인 세상, 서로가 서로에게 원수인 세상으로 돌아간다. 아이의 무구한 눈에 보이는 것은 오욕칠정의 세계이다. 군인과 아이는 한번 만난다. 군인은 아이의 작은 발등에 키스한다. 아이는 자신의 눈으로 보았던 수많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아는 명사가 아니라 감탄사, 목젖의 울림이다. “고통받는 자, 기뻐 눈물을 흘리는 자, 슬퍼하는 자, 사랑하는 자들”이 아를 부르고 그렇게 아는 남들의 부름에 답하는 바깥, 청각적 기표로 정체화된다. 아는 이제 “갈증”과 “괴로움”의 저장소가 되었다. 아의 심장은 뜨겁게 매번 기쁨과 슬픔으로 요동친다. 군인은 아에게 “무겁지 않습니까?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이야기는 중지한다.>
김지민은 자신의 취향이 “고전”에 대한 것임을, “오래된 것만이 내 심장을 뛰게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리고 “지나간 자들의 문명에 대한 자신의 서글픈 노스탤지어”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자문한다. “경험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오래된 노스탤지어”는 해명되지 못한 채, 작가의 감각-몸에서 사는 “극치의 감정”이고, 그것을 풀어놓을 적절한 장소가 템플이어야 했음에 의심을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쟁터의 템플, 신이 부재하는 템플, 그러므로 버려진 장소인 템플이 전시장에 부실하게, 부끄럽게 조성된다. 작가에게는 유학시절 런던의 대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했고 클래식 음악가로 활동을 했던 것, 고전을 옆구리에 끼고 살았던 자신의 이력을 놓고, 그것들은 모두 “서구-고전-고급문화”였다는 인식도 있다. ‘회화’의 기원인 선진유럽으로서의 유학이 제3세계 문화에 의한 오염을 막으려는 진지한/두려운 부모의 의도였다면, 이제 작가는 자신의 성장기를 지배한 문화가 어떤 지역의 문화라는 성찰에도 이르렀다. 그렇게 작가는 제3세계 엘리트 부모가 갖는 불안과 혐오도 넘어섰다. 보편과 특수들이 아니라 오직 특수들의 수평적인 병치, 그러므로 텍스트로서의 인용이 요청되는 시대, 차이의 시간성의 도래를 작가는 이미 읽어서건 느껴서건 알고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데 이미 원수 또한 사랑하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란 작가의 반문(아는 성장 전에 이미 늙었다. 아는 세속의 구조를 이미 넘어서 있다.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할’ 게 별로 없다.)을 반영한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란 본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문장은 서양(우월한 것)과 동양(열등한 것)을 구분했던 부모(의 두려움), 작가가 학교와 성당에서 들었던 어른들의 설교(의 분노)에 대한 ‘아’의 대답/반격일지 모른다. 이제 작가는 비교하고 서열화하는 원수들의 세계에서 나란히 놓고 즐기는 예술가로서 헬렌의 추상표현주의와 동양화를 섞고, “제국주의 문화에 대한 우리가 갖는 기형적 노스탤지어”란 문장이 증명하듯이 자신의 서구적 취향을 넘어서는 ‘다음’ 작업으로 이미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작가는 “제3세계 현대 여성”이라는 문구로 자신의 지역적, 역사적 한계를 가시화하면서 더 넓은 프레임 안에서 텍스트를 짜려고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19살에 러시아에서 난민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문화이론가, 시각예술가, 극작가, 소설가로 살았던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 1959~2015)은 「노스탤지어와 그것의 불만들」이란 논문에서 성찰적(reflective) 노스탤지어와 회복적(restorative) 노스탤지어를 구분했다.[v]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혹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집에 대한 갈망”으로서의 노스탤지어는 “근대적인 시간 개념, 즉 역사와 진보의 시간에 대한 반항”으로써, 유토피아적 미래를 향하는 대신 과거/상실된 것 쪽으로 움직이려는 반역사적, 퇴행적, 반동적 움직임이다. 스베틀라나는 국가와 민족, 혹은 상상의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회복적 노스탤지어를 경계하면서 “한꺼번에 많은 장소에 거주하면서 다른 시간을 상상하는 방법을 탐구하는” 혹은 “시간에서 시간을 빼내고 도망치는 현재를 붙잡는 것”인 성찰적 노스탤지어의 동선에 호소한다.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분리, 격리되고 자발적으로건 비자발적으로건 망명 상태로 살아가는 21세기의 조건 하에서 회복적 노스탤지어가 전쟁과 폭력에 공모하는 바로 그 민족-국가주의의 이데올로기임에 유념한다면, 성찰적 노스탤지어가 어떻게 알레고리적 시선으로 이 세계를 유랑하는 ‘난민’, ‘디아스포라’, 예술가에게 각인된 태도인지는 자명해 보인다. (포스트)역사적 감각은 ‘역사’가 자신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그러므로 후퇴, 추락, 유랑 외에 안전이나 귀속이나 도착은 없을 것이라는 불안이나 우울에 직면하고는 한다. 그리고는 언제나 그렇듯이 ‘원수’를 찾아내고 지목하고 제거하는 절멸의 서사로 그런 불안과 우울을 외면하려고 한다. 성찰적 노스탤지어는 포스트-역사적 우울을 견디면서 역사적 폭력에 맞서면서 포스트-인간들의 이동과 연합하면서 우리의 실낱 같은 생존을 이끌 것이다.
30살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가 그렇듯이 아-예술가에 생물학적 나이가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세계, 바깥, 인간의 감정들이 박히고 쓰이고 녹음되는 몸-장소로서의 아와 김지민은 같으면서 다를 것이다. 김지민은 이제 아에서 떠나려는가? 그럴 리가? 김지민이 근래 서서히 어루만지는 차이, “제3세계 현대 여성”이라는 역사적/지역적 이름에 대한 책임을 그래서 나는 아의 확장이나 변형으로 간주할 것이다. 개인의 운명이나 불행은 작가에게는 차이의 알리바이일뿐이다. 김지민의 인용들로 이루어진 텍스트-짜기가 어디로 가고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걸 보고 있는지 두근거린다.
[i] 크랙 오웬스, 「알레고리적 충동: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을 향하여」,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화두』, 윤난지 엮음, 눈빛, 2007,p. 164.
[ii] 보들레르로 학위논문을 받은 나는 김지민 작가가 인용한 보들레르의 텍스트는 굳이 수소문해서 『벌거벗은 내 마음』에서 인용된 것임을 확인했다. 진보와 해방에 대한 근대의 유토피아적 환상을 임박한 몰락에 대한 예감에 근거하여 가열 차게 비판한, 사후 출간된 이 “일기”에서 보들레르는 “연극에 대한 나의 견해들. 연극에 있어 내가 언제나, 어린 시절에나 여전히 지금까지도 특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그것은 샹들리에빛나고 수정 같으며 복잡하고 둥글며 좌우 대칭의 아름다운 물건. 〔…〕 망원경인 오페라글라스를 반대방향으로 들어 졸보기처럼 사용한다 하더라도, 즉 어떠한 상황에서건 샹들리에는 내게 언제나 주역배우로 보였다.” 샤를르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 마음』, 이건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1, p.87.
[iii] Roland Barthes, “The Death of Author”, Image-Music-Text, trans. Stephane Heath, 1977.
https://sites.tufts.edu/english292b/files/2012/01/Barthes-The-Death-of-the-Author.pdf 참조.
[iv] 보들레르는 앞의 텍스트에서 “존경할만한 것은 세 가지 존재뿐이다. 사제, 전사, 시인. 아는 것, 죽이는 것, 그리고 창조하는 것, 그 외의 다른 인간들은 인두세나 부역을 과하거나 외양간을 위해, 즉 직업이라고 불리는 것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고 일갈한다. 앞의 책, p. 94.
[v] Svetlana Boym, “Nostalgia and Its Discontents,” The Hedgehog Review 9.2 (Summer 2007). https://hedgehogreview.com/issues/the-uses-of-the-past/articles/nostalgia-and-its-discontents 참조.